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중동전쟁 (문단 편집) == 전개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STii6p1Tm8k)]}}}|| || 제1차 중동전쟁의 전개 ||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이 [[텔아비브]] [[미술관]]의 홀에서 건국선언문을 낭독함과 함께 전쟁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아랍인 진영의 아랍민족해방군 사이의 교전이었으나 팔레스타인 내부의 극심한 파벌 싸움 때문에 이들은 서로 이스라엘에게 자기네 경쟁 파벌을 조져달라고 로비나 하다가 각개격파당했고 그 이전까지 팔레스타인의 맹주를 자처하던 [[아민 알후세이니]]는 군사적 기반을 상실하면서 완전히 몰락한다. 이스라엘군은 점령지에서 아랍인들의 추방을 적극 조장하였는데, 이스라엘의 공식 역사학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무런 압력을 가하지 않았는데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알아서, 혹은 주변 아랍 국가 지도자들의 선동 때문에 달아난 것으로 설명했으나 이스라엘이 정부 차원에서 이들의 소개를 도모했다는 것이 문서고 해금으로 증명되고 있다. 다만 이스라엘 스스로도 이것이 정치적으로 대단한 논란이 된다는 것을 알아서 [[인종 청소|민족 청소]] 수준으로 가혹하게 진행하진 않고 일선 군부대도 다 각자 다르게 행동해서 혼란스러웠다. [[아랍계 기독교인]], [[드루즈파]], [[베두인]] 등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의견이 갈렸고 따라서 어떤 지역은 아랍인들이 종교 불문하고 쫓겨나고 어떤 지역은 무슬림만 쫓겨나고 어떤 지역은 종교 불문하고 보호를 받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팔레스타인 지역이 이렇게까지 허망하게 무너진 것은 위에서도 언급된 심각한 파벌 다툼 때문이었고 주요 도시들이 이스라엘군에게 함락되면서 팔레스타인 지식인과 도시인 사회는 완전히 붕괴된다. 팔레스타인의 생각보다도 너무 빠른 붕괴에 경악한 [[시리아]]와 [[레바논]] 및 [[이라크 왕국]]과 [[이집트 왕국]]과 [[요르단 왕국]]의 [[이슬람교도]] [[아랍인]]들은 개입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이를 무시하기에는 정권이 위험해질 것을 느낀 각국은 개입을 하게 되는데, 사실 아랍 국가들의 목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대시리아 왕국 건설의 야심에 불타는 압둘라 1세였다. 압둘라 1세는 명목상 아랍 연합군 총사령관에 추대되었지만 각국은 눈곱만큼도 압둘라 1세에게 협조하지 않았고 압둘라 1세의 이집트 방문 때 이집트군은 압둘라 1세가 자기네 총사령부 근처에도 못가게 하면서 견제했다. 여기에 [[사우디아라비아]], [[예멘]]은 자금과 자원병을 파견하였다. 또한 아랍 각지에서 지원자들로 구성된 '''아랍 해방군'''이 결성되어 파견되었으며, [[팔레스타인]]의 무력충돌 기간 동안 결성된 '''성전군'''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여했다. [[이스라엘군]]의 전력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어 세계 각지에서 수입한 잡다한 무기들을 되는 대로 지급해서 총기를 든 병사 10명이 있으면 그 중 7~8명은 각자 다른 탄을 사용하는 총기여서 탄약 문제가 있었다. 어떤 부대에서는 소유한 총기에 넉넉한 탄약을 가진 병사가 주로 교전을하고 나머지 부대원들은 그 병사가 쉴 동안 그 총을 돌려쓰고 기지 방어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에 반해 영국의 지도를 받은 정예군을 보유했던 [[요르단]], 강력한 공군력을 가진 이집트, 이라크, 프랑스제 기갑장비로 무장한 시리아의 전력은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초기에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점령 및 텔아비브와 예루살렘 가도 확보를 위해서 공세작전을 펼쳤으나 잘 훈련된 요르단군의 공세에 처참하게 박살나고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축출당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한 나머지 아랍군은 어디까지나 요르단을 견제한다는 정치적 목적으로 파견되었고 전쟁 준비란 것이 안된 오합지졸들이라서 싸움 자체를 거의 하지 않거나 보여주기식 포격 및 점령한 일부 아랍 도시의 방어에만 치중했다. 요르단을 제외하면 가장 유의미한 군대를 보낸 나라는 이집트였지만 상술한 대로 싸울 의지도 능력도 없으면서 자기네들이 이긴다는 상부의 망상에 등떠밀렸기 때문에 일선의 장교들의 불만은 엄청난 수준이었고 이러니 제대로 싸울 수 있을리 만무했다. 반면 이스라엘은 [[키부츠]]에서 [[화염병]]을 만들고, 박물관에 전시되었던 대포까지 끌고 오는 등 결사적으로 저항하여 적군의 진격을 막았다. 결국 6월 11일 UN의 중재로 30일 동안 휴전이 선언되면서 양쪽 모두 숨고르기를 할 시간을 벌었고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소련]]의 허가 아래 [[체코슬로바키아 제3공화국|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수입하면서 뒤늦게야 이스라엘군의 본격적인 무장이 시작되었다. 반면 미국, 영국, 프랑스는 유엔에서 선포한 무기 금수 조치를 아주 잘 지켰기 때문에 서방제 무기로 무장했던 아랍군은 탄약이 다 떨어져서 더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 사태를 알고 경악한 요르단은 어떻게든 휴전협정을 연장하려고 했지만 시오니스트들이 별거 아니라는 망상에 휩싸인 다른 아랍 국가들은 이를 죄다 거부했다.[* 아랍 측은 이때 자기네가 삽질한건 싹 무시하고 서구 자본주의 세력이 유대인들에게 대규모 무기지원을 해줬다는 구라를 공식 역사관으로 삼아서 역사 교육과정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7월 8일 이집트군의 기습으로 전쟁이 재개되자 그 사이에 철저한 무장을 갖춘 이스라엘군은 방어에서 아랍 연합군에 대한 전면 공세로 전환하여 전세를 역전시켰고,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주변 거점을 점령하며 [[가나안]] 지역의 안전을 확보하였다. 요르단만 가까스로 예루살렘을 사수했고 나머지 군대는 다들 참패하고 패주한다. 결국 10일 후인 7월 18일 UN의 중재 아래 2차 휴전이 선언되었다. UN은 전쟁을 끝낼 중재안으로 또다른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내놓았지만, 양쪽 모두 이를 거부하고 이스라엘 측은 도리어 분할안을 제안한 스웨덴 대표 [[폴케 베르나도테]]를 암살하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다.[* 왜 이스라엘의 베르나도테 암살이 배은망덕한 짓이냐면 베르나도테는 [[홀로코스트]]에서 유대인들을 구해낸 인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야 자국 편이라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여겼겠지만 말이다.] 결국 평화협상은 실마리를 얻지 못한 채 10월 15일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다. 이 와중에 이라크와 이집트, 시리아는 영국 스파이들이 후방을 교란해서 그런 것이라는 정신승리나 시전하고 있었고 요르단은 아민 알후세이니의 팔레스타인 병력이 자기네 영토에서 설치지 못하도록 때려잡는 데 주력했다. 압둘라 1세는 이스라엘과 비밀 협상을 해서 웨스트뱅크의 영유권을 확보하려다가 들키는 바람에 아랍의 공적으로 찍혀서 비난을 받았고 심지어 시리아는 웨스트뱅크까지 이스라엘에게 줘버리자고 막말을 시전한다.(...) 전쟁이 재개되자 이스라엘은 북쪽 [[갈릴리 호]] 일대를 노린 공세를 펼쳤고 단 10여 일 만에 아랍 연합군을 시리아와 레바논으로 몰아내고 갈릴리 지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 다음 목표로는 아랍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 차지하기에는 아직 애로사항이 있는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 대신 [[무주지]]나 다름없던 남쪽 [[네게브 사막]]을 향한 파상공세를 펼쳤다. 당시 이집트는 군사적으론 참패를 하면서도 요르단 견제에만 눈이 멀어서 가자 지구에 팔레스타인 정부를 수립했고 이 때문에 열받은 요르단은 이스라엘을 응원하는 막장 상태가 된다.(...) 이집트는 병력이 4만명까지 증강된 상태였지만 이 문서에서 내내 강조되었듯이 준비가 안된 상태라서 네게브 사막 전체를 이스라엘에게 내어주고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반도]]까지 진격했다. 결국 이집트는 요르단에 도움을 구걸하기로 했지만 막상 요르단에 도착한 수상 누크라시는 자존심만 앞세우며 "제대로 싸우지도 않는 요르단의 도움 따위 필요없다!" 라고 악을 쓰는 트롤링을 저질렀다. 당연히 빡칠 대로 빡친 요르단은 이집트가 망하든 말든 계속 신경쓰지 않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이 지원의사를 표명했지만 실제로 도와주진 않았다. 이라크만 이스라엘 북부에 상징적으로 포격을 해서 지원하는 시늉만 했다. 요르단이 더 싸울 생각이 없는 상태에서 이집트가 굴욕적으로 패주하게 되자 아랍 국가들은 각자 차례대로 이스라엘과 휴전을 체결하였고 1949년 3월 10일 [[홍해]]와 접한 항구도시인 [[에일라트]]를 점령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스라엘 국기를 게양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면적의 78%를 장악했고, 나머지 지역 중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요르단이 점령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장악한 지역에 살고 있던 7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이 고향을 떠나 [[난민]]으로 전락했다. 아랍 연합군은 압도적인 전력이었지만 실상은 통합된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서로 간의 불신으로 인해 단합이 전혀 되지 않아 전쟁을 효율적으로 진행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들은 얼마 전까지 영국 및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나아가 당시에는 왕가와 반왕파들의 갈등과 내전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베트남 공화국|보통 아랍 연합군이 수적, 화력 면에서 우세했던 것에만 집중하지만 사실 이들은 장비는 우수할지 몰라도 내부적으로 심각하게 분열되어 문제가 이스라엘보다 심각한 수준이었다.]] 실제로 이집트만 해도 파루크 왕가에 불만이 큰 장교들은 일부 작전을 무시했으며 다 이겨 놓고도 일부러 후퇴하여 패배를 자초했다. 이는 만일 이집트군이 승리하면 왕가에 대한 지지가 커질 테고, 그러면 왕가를 뒤엎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장교단은 자신들의 의사도 묻지 않고 자기네를 사지로 밀어넣은 왕정에 대한 불만이 이 전쟁을 기점으로 폭발하였으며 국왕이 패배의 책임을 자기네에게 뒤집어씌워서 숙청할까봐 선수를 치자는 분위기가 팽배하게 된다. 결국 전쟁에 패배하면서 쿠데타의 명분을 얻은 군부는 3년 만에 파루크 국왕의 무함마드 알리 왕조를 [[가말 압델 나세르]]의 군사 쿠데타로 뒤집어엎었다. 다른 나라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귀족 출신으로 우쭐거리는 장교와 강제징집된 사병들의 갈등도 커서 되려 유럽인 [[교관]]들이 "장비만 좋지, 이건 허수아비 군대다." 라고 회고하며 비웃을 정도였다. 그나마 베두인족으로 구성된 정예군을 가진 [[요르단]]군의 경우 지금까지도 미국이나 영국 군사기관들과 교류하는 아랍권의 최정예 군대로 통한다. 다만 요르단은 근본적으로 소국인 데다 가난하고 석유가 없어서 이 훌륭한 군인들에게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같은 장비빨을 세워줄 수는 없다는 점 때문에 대세에는 영향을 주기 힘들었다. 반면 이스라엘의 결사적인 저항은 표면적인 전력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구시가를 포함한 중요지역을 탈환하거나 추가로 점령하기 위해서, [[아랍 연맹]]의 회원국들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위해 전력을 집중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결국 [[제3차 중동전쟁]]으로 비화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